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흐단 흐멜니츠키 (문단 편집) === [[대홍수(역사)|대홍수]] === 흐멜니츠키는 루스 차르국 지원을 얻는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하였고 이에 차르 [[알렉세이 1세]]는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1651년 3월 루스 차르국의 의회 젬스키는 카자크들을 루스 차르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것을 결의하였으나, 이 시절 러시아는 아직 훗날만큼 강대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폴란드에 적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망설였다. 알렉세이 1세는 1653년 11월 젬스키가 카자크 헤트만국을 루스 차르국의 보호국으로 삼으며 폴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함을 결의할 때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류했다. 마침내 다음해인 1654년 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 러시아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는데 페레야슬라우 조약의 결과 카자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키예프 대주교구의 권리 존속 등을 받아내었으며 그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대한 신종과 외교권 박탈에 동의했다. 이로써 루스 차르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쟁이 개시되고 여기서 폴란드는 러시아에 대패하여 파죽지세로 밀렸다. 이 때 간을 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하고 폴란드 왕위를 내놓으라는 명목으로 제 2차 [[북방전쟁]]을 일으킨다. 스웨덴군은 약체화된 폴란드군[* 카자크 대봉기 당시 폴란드군의 피해가 컸고 러시아는 대군을 동원하여 폴란드군을 공격하는 와중에 군대의 일축을 맡은 카자크가 루스 차르국 편에서 싸우면서 폴란드군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 또한 상당수가 지휘관인 귀족들을 따라 스웨덴 편에 가담하는 바람에 결국 이하 생략.]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바르샤바를 함락시켰고 국왕 얀 2세는 [[실레시아]]로 도망가고 만다. 그러자 루스 차르국 측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휴전, 곧바로 스웨덴령인 리보니아를 공격했다. 또 한편 루스 차르국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라지비우(Janusz Radziwiłł)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두 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 보구스와프 라지비우(Bogusław Radziwiłł)가 가져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네이 협정을 맺고 말았다. 연방을 적으로 보는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자로 보고 있었고, 루스 차르국의 휴전을 배신이라고 생각해 차르와 손을 끊기 위한 계획을 준비하던 중 1657년 8월 급사했다. 흐멜니츠키의 봉기가 실패한 이유는 당시 주변 강대국이었던 폴란드와 러시아의 무력 개입으로 인해 봉기 세력이 와해되었고 코자크의 지도부가 심각한 내분을 겪으며 분열되는등 코자크 집단의 투쟁 열기가 줄어들고 코자크군 전력끼리 대립을 겪으면서 코자크들이 원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흐멜니츠키란 구심점을 잃은 우크라이나 지역은 러시아와 폴란드, 튀르크, 타타르, 코사크의 반란까지 온갖 세력이 뒤엉켜 싸우며 국토가 황폐해졌다. 이 시대는 황폐의 시대라고 부른다. 1667년 러시아와 폴란드는 안드루소보 조약을 맺어 우크라이나를 분할해 서쪽은 폴란드가, 동쪽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된다. 흐멜니츠키가 세운 헤트만 체제는 폴란드도 현지 민심을 고려해 바로 해치우진 못했고 1700년에 폐지된다. 러시아령 지역에선 1764년까지 코사크의 자치 정부가 유지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